과학시간에 창조론도 가르쳐야 할까?
1‘진화론은 과학이다’라는 플래카드가 필요한 상황
2012년 8월 10일 영국 밀레니엄스타디움의 올림픽 축구경기장 시상대에는 박종우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승리의 세리모니를 하던 그가 관중으로부터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받아들고 경기장을 뛰어다닌 것이 문제였다.
IOC는 그의 행동이 ‘경기장에서 정치적 활동을 금한다’는 자체 규정을 위반한 사례로 보고 메달 박탈 등의 징계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장 구자철 선수는 골 이후에 독도 세리머니를 생각했었다니 더 큰 논란이 생길 뻔 했다. 그런데 왜 안 했다는 것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니 할 필요가 없었어요. 원래 우리 땅이잖아요. 그래서 만세 세리머니를 했죠.”
맞다. 독도는 우리 땅이다. 당연한 사실이기에 떠들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플래카드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 또한 존재한다(박종우 선수의 행동이 적절했는지는 다른 문제다).
억지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는 무시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최선책이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단호하고 직접적인 대응도 필요하다.
과학의 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학자 사회는 진화론을 성숙한 과학 이론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인데,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며 다른 입장도 가르치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진화론은 훌륭한 과학 이론이니 그들의 억지 주장을 그냥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때로는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플래카드를 들어보여야 할 만큼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2“한국, 창조론자들 요구에 항복하다”- 네이처
“한 창조론 옹호 단체가 과학교과서에서 진화의 일부 사례를 삭제해달라는 청원을 교과부에 제출했습니다. 교과서 집필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였구요. 이 사건에 대해서 진화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러니까 지난 5월 중순경이다. 모 일간지 기자가 이 사태에 대해 전화로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그땐 나도 교과서 저자들이 내리 두 건(시조새와 말의 진화 관련)이나 청원을 수용하기로 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한국의 창조과학 옹호 단체인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이하, 교진추)가 작년 12월과 올 4월에 각각 고등학교 과학교과서의 시조새 부분과 말의 진화 부분에 대해 삭제 및 수정을 요구하는 청원서들을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에 제출했다.
이에 교과서의 저자들이 올 1월과 5월에 청원서의 요구 사항대로 관련 내용을 삭제 또는 수정하겠다는 답변을 교과부를 통해 교진추 측에 전달했다.
이런 사실은 5월 중순에 일반에 알려졌다. 하지만 웬일인지 처음에 국내 언론과 학계는 이 문제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다 6월 7일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 Nature>가 ‘집중 취재’ 코너에서 [한국이 창조론자들의 요구에 항복하다]라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의 한 쪽짜리 기사를 내자 상황이 급하게 돌아갔다. 이 기사가 국내 언론과 여론은 물론 해외 네티즌들까지도 자극했기 때문이다.
곧 전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가 시작되었다. 관련 학계도 공식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첫 번째 대응은 관련 학계가 교진추 청원서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여 언론에 배포한 일이었고, 두 번째 대응은 교진추 청원서에 대한 기각 청원서를 교과부에 제출한 일이었다. 이 일에는 한국 고생물학회, 한국 진화학회 추진위원회, 한국생물과학협회 등 한국의 생물 관련 학계가 모두 나섰다.
물론 그동안 과학자들이 창조과학 옹호자들을 상대해주지 않았던 것은 무서워서가 아니다. 대응해주는 순간 그들을 과학의 링 위에 올려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이 면에서 독도 문제와 유사하다).
하지만 그들은 절차의 사각지대를 통해 이미 링 위에 올라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시 보다는 정확하고 분명한 응대가 더 필요한 일이었다.
3시조새와 말의 진화 대한 반론은 억지에 불과하다
대체 교진추는 무슨 근거로 시조새와 말의 진화에 대한 과학교과서의 내용을 문제 삼았을까? 그 청원서를 입수하기 전에는 혹시 창의적 반론이 있지나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기대는 한숨으로 바뀌었다. 먼저 시조새(Archaeopteryx)의 계통학적 위치에 관한 교진추의 반론부터 간략하게 짚어보자.
그들은 “학계가 시조새를 멸종된 조류 또는 깃털 달린 공룡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시조새가 공룡과 조류의 중간 종이라는 교과서의 기술은 삭제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시조새는 공룡과 조류의 중간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교진추 개정청원위원회 2011).
물론 이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그들은 시조새가 중간 종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전 세계 고생물학계의 한결같은 결론은 시조새가 수각류 공룡과 현생조류의 중간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멸종된 원시조류라는 것이다.
시조새는 현생조류와 달리 이빨이 있고 긴 꼬리뼈를 가졌으며 세 개의 앞발톱이 공룡처럼 발달해 있고 흉골이 매우 작다. 그래서 깃털을 제외한 골격학적 특성만으로는 수각류 공룡에 더 가깝다. 하지만 시조새는 수각류 공룡에서 현생조류로 이어지는 계통적 관계에서 그 중간 어딘가를 차지하는 멸종된 원시조류이다.
그리고 이런 원시조류들은 시조새 말고도 수십 종이 더 발견되었다(Chiappe & Witmer 2002; Zhou 2004). 고생물학계 내부의 실제 논쟁은 이 시조새가 그 수십 종들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계통학적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가에 관한 것일 뿐, 시조새가 중간 종인가 아닌가, 또는 진화의 사례인가 아닌가가 아니다(Plum 2003).
따라서 시조새는 공룡에서 조류로 이어지는 진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며, 이에 대해 기술한 현행 과학교과서의 내용에는 큰 문제가 없다.
말(horse)의 진화에 대한 교진추의 주장은 또 어떤가? 그들은 “말이 몸집이 커지고 발가락 수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진화했다는 말의 화석 계열은 상상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교진추 개정청원위원회 2012).
하지만 말의 진화가 하이라코테리움(Hyracotherium)에서 현생 말(Equus)로 직선적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현대 고생물학자는 없다. 또한 말의 몸집과 발가락 수가 어떤 추세(trend)를 보이며 진화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쯤은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현생 말은 역사상 존재했던 여러 종의 멸절한 다른 말들과는 달리 정말 운 좋게 살아남은 종일뿐이기 때문이다(MacFadden 2005). 몸집이 커지고 발가락 수가 작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했어야 할 본질적 특성은 없다는 이야기다.
다만 몇몇 교과서에 실린 말의 ‘직선형’ 진화 패턴은 학생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소지를 갖고 있다. 이는 교과서 집필진들이 진화론의 핵심 중 하나인 ‘생명의 나무(tree of life)’ 개념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했거나, 고생물학계의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충실히 반영하지 못했기에 생긴 일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말의 진화를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다. 진화의 패턴이 매우 복잡할 뿐 말도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학계의 공식 반박과, 교진추 청원에 대한 기각 청원이 있은 후, 교과부는 “전문협의기구를 통해 현행 과학교과서에 기술된 내용을 검토하고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에 따라 교과부는 과학계의 원로들이 모여있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 교과서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요청하게 되는데, 과학기술한림원은 이를 검토해 '진화론과 관련된 부분은 절대 삭제해서는 안 되며, 다만 일부 오해할 소지가 있는 부분은 최신 과학 연구 결과를 반영해 더욱 분명하게 서술해야 한다'는 결과를 내 놓았다. 또한, 과학기술한림원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진화론은 모든 학생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현대 과학의 핵심 이론"이라고 강조했다. 즉, 교진추의 청원은 오히려 진화론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면서 마무리되었다. 이것이 지난 몇 달 사이에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과학교과서 파문의 개요다.
4그러나, 진화론을 믿지 않은 사람이 30%나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 뒷맛이 영 개운하지 않다. 2009년 EBS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우리 국민 중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전 인구의 30% 정도이다. 더욱이 ‘창조론을 진화론과 함께 가르치자’는 쪽에 손을 든 사람은 무려 60% 정도나 된다.
더욱 황당한 것은 진화론을 믿지 않는 이유 중에서 ‘진화론이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항목에 답한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는 사실이다(EBS 다큐팀 2009). 최근의 교과서 파문 때문에 학계와 언론이 한국의 반진화론 운동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일반 국민의 의식 자체가 순식간에 크게 달라질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이 당혹스런 통계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물론 일선 고등학교의 과학 시간에 진화론 교육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게다가 대학에서의 진화론 교육은 더욱 실망스럽다.
‘일반생물학’ 같은 수업을 듣게 되면 대개 이런 식이지 않았는가? “진화 부분은 여러분이 중고등학교 때 이미 다 배웠으니 시간도 없고 해서 그냥 넘어갑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진화가 과학적 사실이라는 점을 의심하는 시민들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큰 책임은 진화학자, 생물교육학자, 교과서 집필자, 교사들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허술한 진화론 교육만이 문제일까? 나는 과학의 본성에 대한 오해도 진화론을 과학으로 인정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그 오해는 창조론도 과학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요인일 수 있다.
이번 파문에서 교진추 쪽 사람들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주장이 있다. 그것은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신념일 뿐이며 기껏해야 가설에 불과하다”는 발언이다. “창조론이 신념이라면 진화론도 신념일 뿐”이라는 이른바 물귀신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대체 과학을 무엇으로 보기에 이런 무모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진화론도 신념일 뿐일까? 과학적 진술과 일반적 신념 사이의 차이를 알아야 이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크게는 ‘어떤 류의 활동이 과학인가’, ‘과학과 사이비과학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과학이론들은 어떻게 선택되는가?’와 같은 과학의 본성에 관한 물음들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가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5진화론이 과학적이지 않다… 과학이 무엇이길래?
그런데 문제는 이 질문들에 제대로 답하려면 20세기 과학철학의 역사를 훑어봐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절대로 만만한 작업이 아니며 내용도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지난 한 세기 동안 과학의 본성에 대한 큰 논쟁을 이끌었던 대표적 과학철학자들이 ‘과학의 본성과 창조론의 지위’에 관해 어떤 입장인지를 검토해보는 식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 학자로는 칼 포퍼(Karl R. Popper), 토마스 쿤(Thomas S. Kuhn), 임레 라카토슈(Imre Lakatos), 그리고 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 정도가 해당될 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과학의 본성에 대해 포퍼는 반증주의 이론, 쿤은 패러다임 이론, 라카토슈는 연구 프로그램 이론, 파이어아벤트는 무정부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들이 우리의 논의 주제들에 대해 어떻게 달리 대답하는지를 핵심적으로 정리해보자.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과학이란 무엇인가? 둘째, 창조론은 과학인가? 셋째, 창조론을 진화론과 함께 학교에서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
6과학이 무엇인가? 답은 4인 4색
그럼 첫 번째 질문부터 검토해보자. 대체 과학이란 무엇인가? 포퍼의 반증주의에 따르면, 반증이 가능해야 과학적 진술이라 할 수 있다.
즉, 반박할 수 있는 경험적 내용이 없는 진술은 과학적 진술이라 할 수 없다. 과학자란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대담한 가설을 세우고 경험적으로 참인지 거짓인지를 혹독하게 시험해보는 사람들이다. 이 과정에서 반례가 발견되면 지체 없이 자신의 가설을 폐기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 인류가 발명한 가장 비판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포퍼는 ‘끊임없는 비판’이 과학의 핵심이며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쿤은 자신의 명저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과학의 본성에 대해 매우 다른 입장을 제시한다. 그는 과학의 실제 역사와 과학자들의 실제 활동을 분석함으로써 과학은 비판적 작업임과 동시에 순응적 활동이라고 결론내렸다.
예컨대 과학자들은 반례가 나와도 자신들이 믿고 있는 이론을 금방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례를 무시한다. 그래서 언뜻 보면 매우 부정직한 집단 같이 보이기도 한다. 특히 반증주의자인 포퍼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쿤은 과학에는 뚝심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어떤 이론이 난제를 잘 해결했다고 한다면 그 이론에 힘을 실어 주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뭔가 역량이 되는 이론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례가 나왔다고 해서 곧바로 이론을 문제 삼는 건 비판적인 태도일지는 몰라도 꼭 합리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쿤은 과학에 비판만 있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진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쿤은 포퍼와는 달리 과학을 이론을 시험하는 활동이라기보다는 이론에 기반한 활동으로 보았다. 이렇게 과학에서 도그마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그는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다소 위험한 발상이지 않나? 과학에 어찌 도그마가 있단 말인가?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맞다면 양자역학과 점성술이 뭐가 다르겠는가? 점성술도 과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반문에 대해 쿤처럼 과학의 역사성을 강조한 파이어아벤트는 쿤과는 달리 우회로를 찾지 않았다.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며 점성술도 과학이랄 수 있다. 그는 과학의 역사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뉴턴, 갈릴레오 같이 위대한 과학자들은 포퍼의 반증주의도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제시하는 방법론도 따른 바 없다.
오히려 가능한 한 다양하고 참신한 가설들을 어떠한 제약도 없이 증식시키는 것이야말로 과학을 과학답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것이다. 파이어아벤트는 쿤이 과학자들의 일상적인 활동을 마치 깡패 집단의 활동처럼 그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쿤 식으로라면 과학자는 패러다임에게 순응하면서 이단적 생각은 꿈도 못 꾸기 때문이다. 파이어아벤트는 이것이야말로 상상력과 창의성을 말살하는 방법론이며 인류의 지성을 퇴보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너무 극단적이라고 느껴지는가?
한편 라카토슈는 포퍼, 쿤, 파이어아벤트의 사이에서 균형추를 찾으려 했다. 그는 쿤처럼 과학 활동에 독단적 요소가 있음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그것을 ‘견고한 핵’이라고 불렀다. 반례가 생겨도 당분간 이 핵은 끄떡없다.
대신 과학자들은 그 주변부의 소소한 가설들을 이리저리 수정해 본다. 그 반례가 해결될 때까지 말이다. 그래도 안 되면 그때서야 그 핵이 의심받기 시작하고 결국 혁명 비슷한 것이 일어날 조건이 된다.
하지만 보조 가설들로 위기를 막아낼 때 땜질하는 것만으로는 과학의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 땜질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들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라카토슈는 이 정도의 잠재력을 가진 이론만을 과학이라고 부른다.
물론 포퍼는 과학에서 독단적 요소를 인정하는 라카토슈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파이어아벤트는 그것을 범죄 취급할 것이다. 지식의 자유 시장에서 보호 무역을 한다는 것은 반칙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이론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판을 짜주는 것이 과학의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보았다.
반면 쿤에게는 자유 경쟁이 절대선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군소 이론이 난립할 것이고 과학은 혼돈 그 자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과학이 인문사회학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라고 한다. 인문사회학 쪽은 군소 이론들만 난무할 뿐 자연과학에서 엄존하는 패러다임이랄 만한 게 없다.
쿤에 의하면 과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과학자 사회가 어떤 시점이 되면 한 이론에 대해 매우 인상적인 합의에 이른다는 점이다. 즉, 패러다임이 없는 활동은 과학이랄 수 없다는 것이다.
7창조론은 과학인가, 아니면 사이비 과학인가?
이쯤 되면 독자들은 참 난감해질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차이가 나니 말이다.
그러나 과학의 본성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는 것은 진실이다. 이 진실을 받아들인 후에야 창조론이 과학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의미있는 논의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창조론이 과학인지 아닌지에 대해 물을 때[여기서 창조론은 ‘창조과학(creation science)’과 최근의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theory)’을 모두 지칭한다], 대체 과학의 본성에 대한 어떤 입장에서 묻는지부터 명시해야 한다. 창조론은 과학인가, 아니면 사이비과학인가?
우선 급진주의자 파이어아벤트부터 살펴보자. 그는 과학에게만 있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다양하고 참신한 가설들을 증식하는 것이 최선이라면 창조론도 충분히 과학의 배양접시에 올려질 수 있다.
특히, 과학 혁명이 기존 이론과 충돌하는 새 이론의 도전을 통해 이룩되었다고 했을 때, 창조론은 기존 진화론의 훌륭한 대항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연세계가 초자연적 원인에 의해서도 변한다는 창조론자들의 생각을 아주 멋지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의 문을 너무 활짝 열어줘서 누구든 과학의 극장에 들어오게 했다. 그에게 미신과 과학은 종이 한 장 차이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떠받드는 참신성과 다양성은 그것 자체로 절대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정작 기존 과학자 사회는 ‘창조론도 괜찮다’고 말하는 그의 무정부주의적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과학자들이 기득권을 놓지 않아서가 아니다. 창조론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어도 줄 점수가 없기 때문이다.
창조론에 과학 클럽의 입장권을 주려는 시도에 대해 가장 큰 반대를 할 사람은 아마도 포퍼일 것이다. 사실, 지난 90년대부터 미국에서 급부상한 지적 설계론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이론이다.
다윈 이전의 서양 사람들이 믿어온 자연관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포퍼는 틀림없이 이 이론이 반증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할 것이다.
“자연계에는 너무 복잡해서 자연적 진화 과정으로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현상들이 있다”는 가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경험적 증거들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증거가 ‘실제로’ 있고 없고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창조론은 기본적으로 반증가능하지 않단 말이다. ‘신이 설계했다’는데 그걸 입증하거나 반증할만한 사례를 어디서 찾겠는가?
그렇다면 쿤도 창조론이 과학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할까? 대답은 ‘예’이지만, 그런 결론을 내리는 이유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쿤에 의하면, 어떤 이론이 성숙한 과학이 되려면 아까 언급한 패러다임 같은 것이 있어야한다.
즉, 매우 인상적인 문제 풀이 사례가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창조론에 그런 게 있는가? 우리는 진화론이 성숙한 과학이라는 데 동의한다.
진화론은 다양하고 복잡한 자연계의 변화를 설명해줄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지난 150 여 년 동안 패러다임으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해왔다.
생명의 변화와 다양성에 대한 난제들을 매우 성공적으로 풀어왔고, 관련된 학회가 만들어졌고, 대학에서 학자들도 길러냈고, 관련 분야의 연구 논문과 도서가 쏟아졌으며, 지금도 연일 새로운 발견들이 나오고 있다. 패러다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문제는 창조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게 있느냐는 것이다. 쿤의 대답은 명확히 ‘아니오’다.
창조론은 왜 진화론 패러다임을 뒤엎는 대안적 패러다임이 될 수 없단 말인가? 쿤에 따르면 옛 패러다임이 새 패러다임으로 교체되는 과학 혁명기에 과학자들은 옛 패러다임에 대한 엄청난 위기감을 갖는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불안감 말이다. 진화론 패러다임 속에 있는 과학자들이 과연 그런 종류의 위기감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물론 언제나 ‘투덜이’는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진화론은 ‘아직 갈 때까지도 못간 이론’, 다시 말해, ‘아직도 탐구할 것들이 많이 남은 이론’이라는 생각에 거의 동의한다. 이런 마당에 창조론자들이 지적 설계론이라는 새 브랜드를 들고 나와 “혁명” 운운하는 것은 과학의 본성에 대한 무지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쿤이 창조론을 대안적 패러다임으로 고려하지 않는 이유는, 진화론에 대한 대안적 과학이 등장하기 위한 전제 조건부터가 아직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카토슈도 진화론의 기득권을 인정해 준다. 그의 기준으로 보면 진화론은 진보적인 연구 프로그램이다. 과학의 역사를 보면 진화론은 그동안 반례들을 잘 처리해왔고 새로운 예측들도 많이 해냈으며 그 중 많은 것들이 입증되기도 했다.
반면 그는 창조론을 비과학이나 저질과학을 넘어서 사이비과학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대체 무엇이 반례인지조차 알려주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예측이라고 내 놓을 수 있는 것이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이다.
창조론자들의 주장처럼 ‘너무 복잡해서 신의 설계로밖에는 설명될 수 없는 현상들이 많다’고 해보자.
대체 이런 믿음에서 어떤 새로운 현상들이 예측된단 말인가? ‘기존의 진화론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비판은 선거 전략으로 치면 네거티브 캠페인일 뿐이고 흠집 내기 정도라 할 수 있다.
그것으로는 선거에서 이겨 과학이라는 정권을 잡을 수는 없다. 포지티브한 뭔가가 필요하다.
8창조론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가?
지금까지 대표적 과학철학자들이 ‘과학이란 무엇인가’와 ‘창조론은 과학인가’라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내놓았는지를 정리해보았다.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4인 4색이었는데, 창조론이 과학인지 아닌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파이어아벤트만 입장이 달랐다.
이제 가장 현실적인 질문만이 남았다. 창조론도 진화론과 함께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국민은 이 질문에 대해 60%이상이 찬성한다. 과학철학자들은 어떻게 답할까?
포퍼는 과학의 영역으로 불법이민 오려는 사이비과학을 몰아내기 위해 앞장서 온 사람이다. 마르크스 정치경제 이론과 프로이트의 심리 이론이 과학의 영역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이 같은 노력의 결과이다.
그에 따르면 이 이론들을 과학이론으로 가르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창조론도 마찬가지다. 창조론은 입장권도 구입하지 않고(반증주의적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고), 과학의 극장에 들어가려는 사이비과학의 전형이다.
사이비과학을 과학 교과서에 수록해 놓고 진화론과 동등하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 지성의 퇴보를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마술을 허하라”고 외치는 파이어아벤트의 입장에서는 창조론을 과학시간에 가르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 다른 유형의 지식을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지식의 보고 속에 담지 않으려는 것이야 말로 퇴보다. 그의 입장에서 창조론은 인류의 상상력과 다양성 측면에서라도 과학 수업에 들어와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라카토슈라면, “그렇다면 지적 설계론도 가르치는 김에 아예 교과서에 ‘지구에 소풍 나온 외계인이 빵 부스러기를 흘린 것이 생명의 기원’이라는 이론도 끼워넣지 그러는가?”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파이어아벤트보다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런 이야기를 못 만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문제는 그런 무수한 이야기들 중에서 어떤 게 말이 되고 어떤 것이 허접쓰레기인지를 가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 라카토슈의 생각이다.
파이어아벤트는 늘 상상력만 강조하지 어떤 것이 경험적으로 말이 되는 상상력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라카토슈가 보기에는 과학자는 소설가가 아니다.
쿤의 생각은 어떨까? 그는 과학 교과서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에 의하면 어떤 이론을 교과서에 싣고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중요하다. 교과서를 통해 범례(exemplar)를 학습하기 때문이다.
쿤은 패러다임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범례’라는 것을 도입했다. 매우 전형적이고 인상적인 문제 풀이를 일컫는 용어이다. 수학으로 치면 ‘필수예제’에 해당된다. 우리들은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그 범례들을 학습하고 그러면서 응용력을 키운다.
가령, 자유 낙하하는 돌멩이의 운동이나 시계추의 운동이 결국은 동일한 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범례 학습’은 ‘예제 풀기’를 넘어선다.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고 어떤 법칙들로 움직이며 어떤 관계들을 가지는가를 암암리에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격도 없는 것이 범례 행세를 하며 교과서에 등장해서는 안 된다.
창조론이 딱 거기에 해당된다. 쿤의 논리대로라면 창조론은 ‘매우 인상적인 문제 풀이’ 같은 것이 없는 무능한 이론이기에 교과서에서 등장해서는 안 된다.
반면 진화론은 범례가 있고 그 범례에서 파생된 또 다른 흥미로운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틀림없이 쿤은 다음과 같이 결론내릴 것이다. 창조론은 과학 시간에 가르쳐서도 안 되지만, 가르치려 해도 거기에는 가르칠 만한 내용이 없다!
9교양을 진화시킨 엔진, 현대 진화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과학의 본성에 대해 과학철학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적 과학관을 피력한 파이어아벤트를 제외한다면, 학자들 대부분은 창조론은 아직 과학의 극장에 입장하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독자들도 이런 사실을 이해한다면 ‘과학 시간에 창조론도 함께 가르치자’라는 주장에 대해 나름의 판단의 기준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는 이 지면을 통해 “빅 퀘스천”을 던지고자 한다. 이 큰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배움이란 무엇인가’, ‘경쟁이란 무엇인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공감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
누가 감히 이에 대해 만족스러운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젠 이런 큰 질문은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플라톤이나 공자 정도나 묻고 답했던 것들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이 빅 퀘스천은 우리 삶의 근본에 관한 물음이며 영속적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다.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없어지는 질문들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적 시각에서 다시 대답되어야 할 화두인 것이다.
물론 나는 어림도 없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놀랍게도 현대 과학(진화론, 유전학, 뇌과학, 심리학, 행동생태학 등)은 이 빅 퀘스천에 흥미로운 대답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교양을 진화시키는 것은 과학이다. 그리고 현대 진화론은 그 교양의 진화를 이끈 엔진이다. 진화가 오늘 첫 화두가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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